고대정신 전통과 미래 (인권환, 조광, 윤사순, 전승준, 김균   고려대학교 2010.2 127-171쪽)


고대정신과 자연과학


전승준 (화학과 교수)


서문 : 대학의 역사 속에서 자연과학


일찍이 19세기 후반 영국 수상 벤자민 디즈레일리는 의회연설에서 대학은 ‘빛과 자유와 학습의 전당’이라는 말을 했다. 사회에서 고급 지식을 만들고 전수하는 대학이라는 고등교육기관은 12세기 유럽에서 유래한 제도로 우리나라는 20세기 초 도입하였다.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는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학교로 1905년 설립되었다.  대학은 사회의 미래를 밝혀주고, 이를 위하여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구시대의 독단과 독선에 대항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하는 전통은 대학이라는 제도가 만들어진 이래 대학의 역할과 위상을 나타내는 중요한 개념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불행히도 대학 설립초기가 일제의 통치하에 들어가는 시기였기에 대학의 설립과 운영에서 한민족의 미래를 위한 대학설립이나 진정한 의미에서 대학의 자유라는 개념은 존재하기 힘들었다.

유럽의 대학제도가 만들어진 이래, 대학은 사회에서 많이 필요로 하는 고도의 전문적 지식을 가진 전문가를 육성하기 위한 목적이었고, 따라서 중세의 대학은 신학부, 법학부, 의학부와 이러한 전문가 육성에 공통적으로 필요한 기본교육을 담당하는 자연철학부로 구성이 되어 있었다. 일찍이 기하학, 천문학 등 자연과학은 전문가와 지식인들의 기본 소양을 교육하기 위한 중요한 분야이었고 자연철학부의 주요 기본 과목으로 교육하였다. 19세기 초 독일의 베를린대학 이후 연구중심대학의 모형에서 자연과학의 연구는 대학의 핵심적인 임무 중의 하나가 되었다.  19세기 초 독일 기센대학의 화학교수였던 리비히는 대학 내에 교육과 연구에 실험실의 개념을 처음 도입하여 현재의 자연과학 분야의 대학 연구실 모습을 이루는데 선구자가 되었다.  독일의 대학은 연구를 대학의 주요한 개념으로 도입하였고, 베를린대학 설립의 이념인 정치권력에 통제되지 않는 교수의 자유와 학습의 자유가 대학의 이념이었다.  그리고 19세기 후반 독일대학 모형을 도입하는 미국의 대학은 봉사와 사회기여라는 개념을 포함하였고, 사회에 기여하는 실용적인 측면에서 자연과학은 미국대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면서 정부와 산업계에서 대학을 지원하는 전통이 생겨났는데 이는 그만큼 사회의 기여를 요구하기 위한 대가이었고 소수의 미국 연구중심대학은 현재 전 세계적으로 가장 경쟁력있는 대학이 되는데 자연과학분야는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서구에 비하여 대학의 역사는 불과 100년 남짓하고 자연과학의 경우는 일제하에서 자연과학 고급 인력의 양성을 제한하였기 때문에 의학부를 제외하고는 해방직전에야 설치가 가능하였고 고려대학교 역시 해방 후에 농학부와 이학부가 설립되었다.  1960년대 이후 국가에서 산업발전을 위해 이공계 인력 양성을 위한 적극적 지원으로 고려대는 다양한 자연계 학과들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1990년대 세계화와 아울러 과학화의 기치아래 산학연종합연구단지의 설립을 시작으로 과학고대를 향한 전진을 하고 있다.  특히 2000년대 들어오면서 우리나라 대학은 세계적 수준으로 도약을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으며, 보다 정량적 평가가 가능한 자연계의 수준이 대학평가에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그러나 고려대 자연계는 학생수, 교수수, 학과수에서 경쟁하는 국내외의 타 종합대학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적은 규모이기 때문에 자연계 발전을 위한 새로운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따라서 이 글은 고려대학교의 자연계 분야의 발전역사를 정리하고, 고대정신의 강점을 이공계의 미래 전략에 투영하고자 하는 의도이다.


1. 시대정신과 사회 : 사상과 과학

우리는 역사 속에서 변혁이 일어날 때 당시의 시대정신을 이야기한다. 인류 문명의 발전에서 물질세계의 발전은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동인이었다. 즉 전쟁을 위한 무기가 발전하고, 인류의 삶을 편리하고 안락하게 하는 도구들을 만들고, 사회를 운영하는 여러 가지 제도들을 고안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외형적 동인을 이끄는 내면적 동인이 항상 인간의 정신세계 속에 있었고 인류 문명 발전의 진정한 원동력이었다. 신을 받들던 시대의 신에 대한 절대복종이나 인간의 능력을 재발견하는 인본주의는 당시의 시대정신으로 외형적 동인을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물질문명의 발전은 새로운 시대정신을 만드는 기틀이 되었다.  

일찍이 우리들은 관심을 가지는 모든 것을 정신세계와 물질세계로 나누곤 했다.  서양 철학의 시작인 고대 그리스 시대의 초기 탈레스이후 자연에 대한 탐구가 시작되었다. 당시 철학자들은 ‘자연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저술들을 많이 남겼는데 주로 인간이 살고 있는 자연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를 탐구하고 자연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다가 소피스트 시대 이후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 자체에 대하여 탐구를 시작하였다.  따라서 물질세계에서 인간의 정신세계에 관심을 더욱 집중하였다.  특히 생각하고 좋은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정신세계는 생물 중에도 인간만이 가진 특권이라고 생각하였다.  

정신세계를 형성하는 데에는 이성적인 면과 감성적인 면이 관여할 것이다. 시대정신은 당대의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사상적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이성과 감성이 어우러져 형성되는 것으로 당시의 외부 환경과 밀접한 관련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개개인의 인간정신을 넘어서 그 사회, 그리고 그 시대의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정신세계로서 그 사회의 구성원이 공통적으로 무의식중에 표출하는 행동의 근저에 자리 잡고 있다. 고대정신은 고대 구성원을 대상으로 하는 하나의 사회와 개교 이래 지난 100여년간 형성된 시대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정신의 내용은 변하지 않고 내려오는 전통적인 부분이 있을 수 있고, 역사 속의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서구 근대과학은 16,17세기 르네 데카르트의 합리주의에 입각한 기계철학의 정신과 프란시스 베이커의 실용주의의 사상적 배경을 가지고 발전하게 되었다.  특히 베이컨은 그리스시대이래 자연철학의 방법을 비판하고 실험과 관찰에 근거한 귀납적 방법론을 주장하여 과학적 방법(Scienctific Method)의 근간이 되었다. 이러한 과학적 방법은 갈릴레오, 뉴턴과 같은 과학자에 의하여 근대과학혁명을 만들었고, 근대과학혁명은 18세기 서구 계몽사상을 확고히 하는데 기여하기도 하고, 19세기 초의 반동적인 낭만주위 운동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역사가 보여주는 것은 사상의 변화는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한 물질 문명의 발전을 이끌고 과학기술의 발전은 다시 사람들의 새로운 사상을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2. 고려대학교 자연과학 역사와 전통1)


1) 해방 이전의 이공계

우리나라의 고등교육기관은 일제 식민지하에서 경성제국대학 이외에는 전문학교이었다.  보성전문학교는 1905년 전문학교로 설립하였는데 설립 당시 황성신문에 법학, 이재학, 농업학, 상업학, 공업학의 5개 전문과 학생모집광고가 실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농업, 상업, 공업의 지원학생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보성전문학교의 이공계 전문과가 만들어지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를 통하여 학교는 설립 당시 이공계의 중요성을 인식한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종래 보성소학교에서 관할하던 임업과를 1909년 2월 본교에 이관하였고 현 마포구 도화동 근처에 있던 임업시험장을 정부로부터 차용하여 임업속성과를 개설하였다. 이는 본교  최초의 이공계 전문교육과정으로 수학기간은 약 1년 정도로 추정하는데 당시 학교 재정의 어려움으로 임업시험장이 정부에 반환하면서 자연 폐지되었다고 추측된다. 한일합방 해인 1910년 보성대학 설립을 제창하고 인가신청을 하였으나 총독부로부터 거절당하였다.  3·1운동이후 1920년대 식민지 상태를 벗어나기 위하여 실력을 기르자는 실력양성론이 대두되었는데 이 운동의 양대 지주는 ‘교육 진흥’과 ‘산업 개발’이었다. 이를 구현하기 위하여 민족자본육성, 국산품애용의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 설립운동이 일어난다. 민립대학 설립은 결국 일제의 회유와 방해로 좌절 되었지만 관립학교인 경성제국대학이 1924년 설립되었다.  그리고 당시 민립대학설립을 염원하였던 김성수선생께서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여 민립대학설립의 기초를 만들었다. 실력을 양성하기 위하여 당연히 자연과학분야의 고급 인재를 육성하여야 했지만 일제는 오직 동화교육이 목적이었기에 이·공·농과의 설치를 제한하였다.  경성제국대학도 설립당시 의학부만 설치하였고, 대륙침략으로 한반도의 병참기지화에 따라 이공계 고급기술인력 수급을 위하여 1941년 이공학부를 설치하도록 하였다.

보성전문학교에서도 농과·임과를 신설하려는 계획을 1935년 총독부에 제출하였다. 계획은 1940년도부터 농과, 임과를 신설하여, 수업 연한은 3년으로 하고, 농과의 정원은 240명, 임과의 정원은 120명으로 하는 것이었다.  운영을 위하여 전임교수 17인을 두기로 하고 안암동 신축교사에 교수실, 사무실, 강의실을 사용할 계획이었으며 실험실과 실습실 등은 신축하기로 하였다. 실습지와 연습지로 안암동 교지 6만평에 인접한 임업시험장용지 20정8반2부 등 총 128정1반3무4보의 땅을 매일할 계획이었다. 토지를 매입하고 시설물을 갖추는데 약 24만 2천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김재수, 김상만 2인이 제공하는 삼청동 소재 대지 6,185평을 매각하여 20만원을 마련하고, 전북 정읍군 소재 토지로부터 나오는 추수 곡을 5년 적립하여 4만2천원을 마련하는 조달 계획을 세워 총독부에 제시하였다. 당시 관립으로 수원에 고등농림학교와 숭실전문학교의 농과가 있었을 뿐이었고 두 학교의 총 정원이 95명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이 계획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신청 당시 총독부에서도 한국에 견실한 농업전문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기에 제출된 계획을 신중하게 검토하였다.  다음 해에 독립된 캠퍼스로 분리할 것과 당초 학생 정원을 줄이고 교수진을 강화하는 조건을 충족하면 허가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당시 제시한 자금 조달 계획 중에 추수곡 적립금에 대한 불확실성을 문제 삼았고, 9개월을 끌다가 결국 자금조달계획이 미비하는 이유로 보류하여 이공계 학부의 설립계획은 좌절하였다.


2) 해방이후

해방 후 1946년 보성전문학교는 고려대학교로 승격하면서 해방 전까지 유지하였던 법과와 상과를 정법대학과 경상대학으로 승격시킨 이외에 문과대학을 설치하여 3개 단과대학으로 출범한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이공계 설치를 위한 시설투자가 막대하기 때문에 사립대학으로는 이공계학과 신설이 쉽지 않았고 고려대학교의 승격 당시에도 마찬가지의 이유로서 신설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민족대학을 지향하기 위하여 당시 인구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기에 농업은 중요한 학문이었다.  따라서 농림대학의 신설을 위하여 계속 준비하였다. 연습예정지로 시내 종암동 부근에 많은 토지와 산림을 구입하고, 경기도 양평군에 광대한 산림을 준비하였다.  고려대학교 승격 후 농림대학과 문과대학내 이학계통 학과 신설을 준비하다가, 비록 전쟁 중이지만 대구교사시절인 1951년 우선 농림대학을 농학과, 임학과, 축산과의 3과로 신설인가를 요청하였지만 오직 농학과만 인가되어 1952년에는 학생을 모집하지 않았다. 1952년 농림대학의 임학과, 축산학과(개설안됨) 외에 문과대학내에 수물학과, 화학과, 생물학과를 신설하여 문리과대학으로 개편할 것을 당국에 인가 신청하여 통과가 되어 1953년 고려대학교 내에 드디어 이공계 학과가 탄생하게 되었다.  초대 농림대학장으로 장상욱 교수가 취임하였고 종암동과 안암동일대 교사부지 7,326여평과 실험농장용 부지로 논 72,456평을 확보하였고 이과계열의 실험실습기자재 구입으로 100만원의 예산을 사용하였다. 당시 문리과대학과 농림대학의 5개학과의 신입생 모집정원은 각 학과가 40명씩이었고, 이로써 4개 단과대학, 13개 학과 총 학생 정원이 2560명의 명실상부한 종합대학이 되었다.  그리고 농림대학 시설로 철원 제2연습림 125만 평을 수복지역에 마련하였다. 이공계 학과의 교수로 1953년 5월 장상욱과 박정기를 교수로, 홍기욱, 윤세창, 성창환이 조교수, 김정흠이 조수로 부임하였고, 이어 이종진, 김장수를 조교수, 김진웅을 전임강사에 임명하였다. 1954년 문리과대학은 문학부와 이학부로 나누어 수물학과는 수학과와 물리학과로 나누고 각 40명씩의 신입생 정원을 갖게되었고 1955년 농림대학도 농예화학과를 신입생 정원 40명으로 설치하였고, 1959년 농업경영학과를 신설하였으며, 대학명도 농과대학으로 변경하였다.

농과대학은 대구에서 창설한 이래 교사가 없어 상당한 불편을 겪고 있었고 ‘대학설치기준령’에 의하여 단독교사를 건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도서관 동쪽에 농과대학 건물을 1955년 착공하여 석조 2층 520평으로 1956년 완공하어 최초의 자연계 단독 건물을 갖게 되었다. 1955년 농과대학 교사의 착공과 동시에 이학부 실험실 건물도 착공하였다. 그러나 한꺼번에 다 건축할 수 없어 서관 남쪽에 임시목조건물 3동 275평을 지어 물리학과, 화학과, 생물학과에서 한 동씩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1959년 서단에 철근 콘크리트 3층 총 건평 1,635평의 과학관 건물을 착공하여 1960년 12월에 준공되었다.   실험장비로서 1958년 미국 국제원조처 자금 15,000달러로 미국 노스아메리칸 필립스 회사 최신식 X선 회절장치를 당시 국내 유일하게 도입·운영하였다.

농과대학은 농산가공 실험실 등 실험실 건물을 1963년 신축하였고, 같은 해 재단에서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고송리 소재 임야 167만평을 임학과 실습림으로 구입하였다. 이미 실습으로 사용하던 곳으로 국유림을 불하함에 따라 구입하게 되어 재단에서 숙사를 마련하여 실험실습과 조립사업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1964년 재단에서 양주군 와부면 일대 10만평을 구입하여 총 5개년 계획으로 본격적인 종합농장 조성을 시작하였다. 도로 건설과 저수지를 활용한 농사 시설, 산림묘포장, 과수원, 축사와 방목지를 조성하였고, 사무실, 학생휴계실 등을 갖춘 건물을 완성하였다. 1966년 인접한 과수원 5천여평을 추가로 매입하여 농과대학 부속 덕소농장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960년대에 들어와 정부가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하면서 이를 뒷받침할 이공계인력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여 고려대학교도 1963년 공학계인 화학공학과를 문리과대학 이학부내에 설치하였다. 당초 계획은 기계공학과와 전기공학과까지 신설하여 모두 4개학과로 이루어진 공과대학을 세울 예정이었으나 문교부의 인가에 문제가 생겨, 1964년 문리과대학의 이학부를 분리하고 토목공학과와 건축공학부를 신설하여 7개학과로 이공대학을 설립하였다.  이공대학장은 당시 부총장 이종우 교수가 임명되어 겸직하였고 공학부장에 새로 부임한 최한석교수가 임명되었다. 또한 농과대학에도 원예학과와 축산학과가 신설되었다.  1965년에는 기계공학과가 신설되었으나 별도의 증원이 아니라 인문사회과학 부문의 학과 정원을 자체적으로 조정하여 책정하도록 하여 50명을 모집하였다. 당시 정부의 과학기술진흥 원칙에 부합하는 공학계열 학과의 신청이 거부되는 난관이 있었지만 1968년 농과대학의 식품공학과와 이공대학 공학부의 전기공학과, 금속공학과, 공업경영학과등 4개의 학과가 신설되었다. 1969년에는 이공대학에 지질학과, 전자공학과, 요업공학과의 3개 학과가 신설되었고, 학과증설 및 증원과 더불어 대일 청구권자금으로 실험기자재도입도 이루어졌다.  도입된 실험기자재로 적외선 분광기, 고성능 전자현미경등 당시 최첨단 장비를 갖추게 되었다.

1964년학년도부터 교양학부가 설치되어 1학년 학생 전체를 대상으로 교양과목 수업을 담당하게 하였다. 교양학부 설치계획은 이미 1957년 부터 안암동 로터리의 애기능에 신축건물을 착공하면서 시작하였다. 이 건물은 당초 의과대학 신설을 목적으로 시작된 것이었으나 여건이 여의치 못하여 중단되었다가 초기에 건평 8백평의 5층 건물로 부분적으로 완공되어 교양학부에서 사용하였다. 이 건물 신축은 현재 자연계 캠퍼스를 조성하는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후에 5층 철근 콘크리트 3,773평의 건물이 완공되어 공학부와 교양학부에서 사용하였다가, 1968년 본교에 위치하였던 이학부와 교양학부가 서로 위치를 바꾸어 이공대학에서 전체의 건물을 동서로 이학부와 공학부가 나누어 사용하게 되었다.

이공계의 연구소로는 한국곤충연구소가 본부소속 부설기관으로 1963년 처음 설치되었고, 국제농업자원연구소가 농과대학 부속기관으로 1964년 설치되었다.  그리고 생산기술연구소가 1967년 설립되어 박기채교수가 초대소장에 임명되었다. 


3) 1970년대 이후 : 의과대학과 이공계 캠퍼스 조성

1971년 본교재단은 우석대학교의 학교법인 우석학원을 흡수 합병하였다. 동시에 의과대학, 의과대학 병설 의학기술초급대학, 의과대학 부설 우석병원이 출범하여 현재의 의과대학과 부속병원을 이루는 기반이 된다.  우석대학은 1938년 설립된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를 모태로 서울여자의과대학, 수도의과대학, 우석대학교를 거쳐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합병 당시 우석대학교에 의예과와 간호학과로 구성된 의과대학이외에 문리과대학 이공학부에 생물학과, 응용물리학과, 화학공학과가 있었기에 기존의 고려대내의 유사학과와 합쳐지게 되었다. 흡수합병 당시 병원은 ‘고려대학교 의과대학부속 우석병원’이었으나 1976년 3월 명칭을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변경하여 일반적으로 고대병원으로 부르게 되었다.  우석대학교가 병합됨에 따라 의과대학 발전계획의 일환으로 1974년 총 182병상의 연건평 3천평의 초현대식 시설을 갖춘 신축건물을 완공하여 병상수가 482병상으로 대폭 증가하였다. 한편 1975년 병설 의학기술초급대학을 정릉분교로 이전하였고 1979년 보건전문대학으로 개편하였다. 1979년 본교 종합발전계획의 일환으로 의과대학의 병원 신축을 위하여 독일에서 차관 도입을 결정하였다. 신축병원 후보지로서는 구로공단지역, 반월지역, 여주지역을 선정하여 1,750만 마르크(당시 한화 약 45억원) 규모의 차관을 도입하기로 하였다. 독일차관이외에 정부보조비 40억원, 학교부담 45억원으로 총 130억원을 투입하였다.

1983년 당시 운영하던 부속병원과 뒤이어 개원하게 될 3개 부속병원을 합리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의료원체제로 개편하기 위하여 재단이사회의 결의를 거쳐 문교부에 신청함으로써 고려대학교 의료원 체제를 이루었다. 구로병원은 1983년 300 병상으로 개원하였으나 다음해에 500병상으로 확장하였고, 여주병원은 1984년 50병상으로 개원하였고, 1985년 개원한 반월병원은 100 병상을 갖추었다.  제10대 총장으로 이준범 총장이 취임한 이후 1986년부터 의과대학과 혜화병원이 이전하는 ‘녹지캠퍼스 조성 계획’을 발표했다. 1987년부터 부지 조성과 의과대학과 부속병원 건물 착공을 시작하여 약 200억원을 소요하여 1990년 완공하였다. 

1960년대 후반 우리나라에서 컴퓨터는 최첨단 이공계 학문연구의 상징이었다.  학내 전자계산 연구실이 1970년 4월 발족되었고 초대연구실장에 서남원 교수가 임명되었다.  1973년 4월 미국 AIM으로부터 교육용 소형전자 계산기 System 1130Model2C를 도입하여 이공대에 설치하였다. 그러나 급속도로 변화하는 업무량으로 인하여 1977년 국내대학 최대 규모의 IBM 370/114 컴퓨터를 도입하였다. 이후 1982년 전산소의 독립 건물이 완공되었다. LAN 시스템은 1989년부터 설비를 갖추기 시작하여 삼성전자의 설비 기증으로 당시 서울대와 연세대와 함께 구축하여 1991년 개통하였다. LAN 시스템은 전자계산소의 주 컴퓨터로부터 이공관, 정경관, 본관, 중앙도서관등이 연결되는 backbone system을 중심으로 교수연구실과 중앙행정부서를 연결하여 초당 6250자의 전송속도로 정보를 교환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91년 6억원 상당의 IBM ES/9000과 IBM RS/6000 3대 등의 컴퓨터를 도입하여 연구활동과 학생실습, 학사행정업무 능력을 향상시켰다.

1973년 서독 정부의 무상 교육원조의 지원으로 장기종합발전계획에 따라 1976년 농과대학건물 신축과 함께 농공병행교육의 집체지(Science Complex)가 조성되면서 자연계 캠퍼스의 모습이 갖추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1983년 7월 애기능캠퍼스에 과학도서관 건물을 준공하였으며, 조직도 종전의 이공대 도서실을 과학도서관으로 개편하였다. 이공대학은 1977년 이과대학과 공과대학으로 분리하고 이공대학 애기능 캠퍼스 내에 3500평 규모의 새로운 이과대학 건물을 신축하기로 하여 기존의 이공대 건물은 새로 분리된 공과대학에서 사용하기로 계획하였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문교부나 과학기술처 등 정부 부처에서 지급되는 연구지원비를 비롯하여 각종 학술재단이나 외부학술단체로부터 연구지원은 교수들의 연구를 독려하였다. 1970년 과학기술처에서 조사연구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물리학과 김종오 교수(제목 : 우주선에 관한 연구)등 5명에게 연구비를 지급하였고, 1971년도에 과학기술처의 연구개발 사업은 화학과 김태린 교수(제목: 비닐에텔의 가수분해)등 본교 6명에게 1,150만원을 배정하였다. 1976년에는 의과대학 이호왕 교수와 이평우 연구부장이 우리나라 전역에서 발생하던 한국형 유행성 출혈열의 병원체와 그 면역체를 세계 최초로 분리 규명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Korea virus로 명명된 이 항원의 발견으로 이호왕교수는 한국인 최초로 미국 국방성으로부터 미국 최고국민훈장을 수여 받았다.

1980년 1월 문교부로부터 조치원분교 내에 8개학과의 설치를 인가받았는데 자연계로 물리학과와 화학과가 포함되었다. 그 해 10월 수학과와 응용통계학과의 설치도 인가되었다. 그 후 이 학과들은 문리대학에 소속되었다. 1986년에는 서창 문리대학에 전산학과와 생물공학과가 신설되었고, 1987년 문리대학이 인문대학과 자연과학대학으로 분리 개편되면서 신설된 자연과학대학에 소속되었고 정보공학과와 식량공학과가 신설되었다. 이 해 조치원분교의 명칭을 ‘서창캠퍼스’로 제정하였다. 1989년 자연과학대학 내에 제어계측공학과, 환경과학과, 보건과학과. 사회체육과학과가 신설되었다. 그리고 1989년 서창총학생회에서 꾸준히 제기해온 서창캠퍼스의 자연과학대학 신축공사를 시작하여 1991년 완공하였다. 

1980년대에도 계속하여 신설학과가 생겨났다. 1983년 9월 농과대학에 유전공학과와 이과대학에 전산과학과가 신설되었고, 공과대학의 전자공학과의 명칭을 전자전산공학과로 변경하였다. 

1980년대 고려대 자연계열의 교육 및 연구상황은 열악하였다. 1982년 과학도서관 기공식 직후 이공대학의 문제점을 지적한 기사가 실렸다. 기사에서 본교 과학교육이 부실하여 본교를 졸업하고 연구소나 대학원에 진출하여 이를 뼈저리게 느끼는 졸업생들 사이에 본교의 과학교육의 혁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비등하다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개선 방안으로 첫째 부족한 교수인원 때문에 타 대학에 비해 전공과목의 개설 강좌수가 적어 이를 개선하기 위하여 교원을 충원할 것과, 둘째 자연과학분야 서적이 매우 빈약하여 이를 보완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셋째 낡은 실험기재를 보완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당시 이공계의 연구 및 실험실습 기기 부족은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 1986년에 해외경제협력기금(Oversea Economic Cooperation Fund, OECF)차관으로 3억 9,594만 3,294엔(한화 약 23억 3천만 원)을 도입하였다.  이 차관은 공과대학 9개학과에 5,350만 엔(3억 4천만 원), 과학기재 개발실에 357만 엔(2천만 원), 이과대학 5개학과에 3,939만 엔(2억 2천만 원), 공대 공동실험실에 1,569만 엔(8,900만 원), 농대 유전공학과에 1,143만 엔(6,300만 원), 의과대학 학부실습용에 3,510만 엔(1억 2천만 원), 의과대학 대학원 실습용에 2억 5,150만 엔(14억 3천만 원)을 배정하였다. 이 차관은 상환기간이 18년이며, 이자율은 연 5%로서 자연계 연구와 실험 장비 부족 문제를 다소 해결하게 되었다.

1980년대 후반 연구여건은 차츰 개선되었는데 당시 교수들의 연구비 지급이 자연계열로 집중되고 있었다. 이에 인문사회계열에서 그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자연계열과 인문사회계열과의 균형을 고려하여 연구비를 지급해야 한다는 의견이 교내외에서 제기되었다.


4) 1990년대 이후 : 과학고대로 발전

1990년 제12대 총장으로 취임한 김희집 총장은 대학교육의 과학화와 국제화를 교육목표로 내세웠고,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1991년 2월 교무처 소속으로 연구과를 신설하였다. 연구 활동을 활성화하기 위하여 교원들에게 일정기간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7년마다 1회씩 1년동안 연구년을 부여하는 교원 연구년 제도를 도입하였고,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등 외부 연구기관과 협동연구를 활성화하기 위한 학연협동과정을 신설하였다. 또한 학문 연구를 장려하기 위하여 교내 특별연구비 지원 규정을 신설하여 1인당 년 5백만원의 연구비를 지원하였다. 그리고 교원들에게 좋은 교육과 연구를 독려하기 위하여 1995년 부터 교수평가제를 도입하였다. 교수평가 내용은 연구실적, 강의평가, 사회봉사 부분으로 나누어 세부항목에 대하여 평가하여 직위승진과 호봉승진에 반영하였다. 연구과는 1992년 6월 연구교류처로 개편되어 연구와 국제협력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 동안 부속연구소 단위로 시행한 연구비 관리체계를 1993년 9월 연구비 관리규정을 만들어 그 해 12월 1일 이후 시작하는 교내외 연구비를 중앙관리하게 되었다. 이 제도는 일정한 기준을 정하여 능력있는 부설연구소를 연구비 관리기관으로 지정하여 연구비 및 연구 간접 경비를 관리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총 22개 연구소가 지정을 받았는데 자연계통 부설연구소는 자연자원연구소, 생산기술연구소, 기초과학연구소, 환경의학연구소, 생물공학연구소, 정보통신기술연구소, 자연과학연구소, 전략광물자원연구소의 8개였다.  또한 국내 대학으로는 처음으로 자연과학 분야에서의 외국인 교수 채용과 신입교수 연령제한 철폐를 천명하여 국제화에 대비하고 중진 우수 교수 영입을 위한 조치를 선도하였다.

자연계열의 학과의 신설도 이어졌는데 1991년 공과대학에 전파공학과를 신설하였다. 그리고 농과대학을 자연자원대학으로, 공과대학 토목공학과를 토목환경공학과로, 전자전산공학과를 전자공학과로 개칭하였다.  1994년에는 대학원 전공과목으로 협동과정 과학학을 신설하였다. 이는 인문사회와 자연과학을 복합한 학문으로서 자연계열 교수와 인문사회계열 교수 두 명이 한 팀으로 하여 강의와 연구 지도를 하는 두 스승 제도를 도입하였다. 

1990년대에 과학기술계의 최대 관심사 중의 하나가 대학과 정부출연연구소, 그리고 산업계사이의 협력관계였다.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연구개발은 1960-70년대 정부주도로 출연연구소를 중심으로 진행하였다. 대학에 연구비를 지원하는 정부지원 연구재단이 설립되어 1980년대부터 정부에서 대학에 본격적으로 연구비를 지원하기 시작하였고, 기업에서도 대기업을 중심으로 연구소를 설립하여 자체적으로 연구개발을 시작하였다. 1990년에 들어오면서 연구수행 주체인 산.학.연 사이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공유하게 되었다. 당시 “과학고대”를 지향한 학교 정책과 함께 산.학.연을 한 곳에 모아서 공동연구, 정보교환, 연구 인력과 시설의 공동 활용의 장소를 마련하겠다는 의도는 시의 적절하였다. 이의 일환으로 1992년 산학연종합연구단지 설립을 기획하여 언론기관을 통하여 공표하였다. 이듬해 설립추진본부를 발족하고 1994년 건물을 착공하여 1996년 공학연구동과 산학연구동이 완공되었다. 공학연구동은 공과대학이 입주하였고 산학연구동에는 연구단지 참여사로서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 주식회사 삼양사, 삼성전자, LG전자, LG반도체, 한국전기통신공사 등 산업체 연구소가 입주하였다. 아울러 정주영 현대그릅 명예회장의 기증으로 1996년 아산이학관을 준공하여 이과대학이 입주하였다.

본교는 1994년말까지 65억여원의 산학기금을 기업으로부터 지원받았다. 대표적으로 코오롱그릅에서 3차례에 걸쳐 5억원을, 한국화학그릅, (주)한국이동통신에서 각각 1억원, 한국무협협회에서 3억 5천만원, 그리고 쌍용그릅, (주)데이콤에서도 발전기금으로 전달 받아 공과대학의 시설확충, 실험기자재 구입, 장학금 지급 등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앞서 언급한 산학연 종합연구단지 테크노콤플렉스에 약 2백억원의 기부금 약정이 체결되었다. 1993년 12월 포항제출주식회사가 70억원을 약정하고 전액 입금한 데 이어, 주식회사 삼양사가 7억원,  삼성전자주식회사가 70억원, 주식회사 금성사가 50억원, 금성 일렉트론 주식회사가 20억원, 이수화학공업주식회사가 14억원의 약정을 체결하여 테크노콤플렉스 건물 신축에 사용되었다.  이와 같이 민간기업을 비롯한 각 종 정부지원 연구소 및 국내외 대학과 상호 공동연구, 인적자원의 교류, 학연협동과정 운영을 통하여 협력을 유지하였다.  특히 한국과학기술원(KIST)과는 지리적으로 근접해 있는 이점을 살려 가장 활발하게 학연협동과정을 운영하였다.  당시 연구비 수주 실적이 1992년 387건 46억 7천만원, 1993년 591건 47억 7천만원, 1994년 721건 70억8천만원이었다.

정부출연연구원인 기초과학지원센터 서울분소를 고려대내에 유치하였다.  기초과학지원센터의 본부는 대덕연구단지에 있으며 전국 주요 지역에 분소를 두고 있는데 유일하게 사립대학으로 서울분소를 유치하였다. 이를 위한 단독건물을 1993년 준공하여 핵자기공명분광기를 포함하여 700만달러 상당의 42종의 고가 첨단 연구장비가 설치되었다. 1989년부터 한국과학재단에서 시행한 우수연구센터(SRC,ERC)사업은 당시 우수 연구집단을 육성하기 위하여 파격적인 연구비를 지원하는 사업이었다. 고려대에서는 SRC로서 1991년 전략광물자원연구센터, 1998년 전자광감응연구센터, 2003년 식물신호네트워크연구센터, ERC로서 2000년 유변공정연구센터, 2007년 인간중심제품혁신연구센터가 선정되어 9년 동안 지원을 받았다.

1991년 정부에서는 우수인력에게 지속적인 연구기회를 부여하여 국가가 필요로하는 고급과학기술 인력을 육성한다는 취지의 병역특례 지정 연구소 제도를 실시하였다. 전국 12개 대학교에 40개 연구소가 병역특례 지정 연구소로 지정되었는데 본교가 9개를 차지 하였다. 이 중 자연계 연구소로 기초과학연구소, 생물공학연구소, 생산기술연구소, 자연자원연구소의 4 곳이 지정받았다.

1990년대 후반 우리나라는 IMF로부터 지원받는 국가부도의 사태를 맞이하여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하였다. 1990년 대 미국의 실리콘밸리는 벤처붐에 힘입어 미국 경제에 활력을 불어 넣고 있었다. 이에 자극받아 우리나라에서도 정부에서 벤처기업 육성을 적극 장려하였다.  1998년 벤처연구소 ‘안암미디어’가 설립되어 활동하게 되었다. 공학기술이론의 실용화와 학생들을 대상으로한 연구실습 교육, 이익금의 교내 환원들을 취지로 설립하여 ‘JK미디어’로 교내에서 활동하여 대학내 벤처기업으로 사업자 등록을 하여 운영하였다. 

‘녹지캠퍼스 조성계획’에 의하여 1991년 10월 녹지캠퍼스의 안암병원이 혜화동으로부터 이전하여 개원하였고, 이은 교수연구동 건립으로 1천여 개의 병상을 갖추고 총 31개 임상과가 진료를 시작하였다. 동시에 고려대 의료원 행정체제를 의무부총장제로 개편하여 의과대학, 의학도서관, 4개 병원이 의료교육기관 산하에 총괄되어 일반 학교 행정으로부터 독립된 분권을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고대 의료원은 안암, 구로, 안산, 여주 병원을 포함하여 총 1570병상과 1천여명의 의료진을 확보하게 되었다. 또한 1994년 안암병원 내에 생명과학연구소(중앙의학연구소)를 설치하여 임상실험을 통한 연구활동을 독려하여 기초임상 공동연구를 극대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후 1996년 의료원의 업무를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하여 의무부총장이 의료원장을 겸직하도록 하였고, 교육연구 수련부와 간호과 등을 신설하였다.  1998년 고려대 보건과학대가 신설되어 고려대 병설 보건대는 보건과학대에 통폐합되었고 1999년 의과대학 간호학과가 간호대학으로 승격되었다.

서창캠퍼스에는 1997년 자연과학대학에 산업기술개발지원단을 마련하여 특성화된 기술개발을 필요로 하는 산업체가 회원사로 가입하여 교수로부터 자문을 얻도록 하여 산학협력을 모색하였다.  이후 자연과학대학은 과학기술대학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안암캠퍼스의 유사학과와 차별화를 위하여 교과과정과 학과명칭를 개편하였다. 

1990년대부터 산업계와 학계에서는 IT와 BT분야를 미래 유망한 분야로 지목하였고, 이를  육성하기 위한 정부 정책이 입안되었다. 1995년 생명공학원이 교육부의 이공계대학원 중점 지원 육성사업 국책대학원으로 선정되었다. 이 사업은 고급 연구개발 인력 양성과 세계 수준의 대학 육성을 통하여 국가 경쟁력을 끌어 올리려는 목적으로 시행한 교육 개혁 조치 중의 하나였다. 정부는 5개의 국책대학원을 선정하였는데 본교에서는 생명공학원이 선정되어 5년동안 연간 약 35억원의 국고 지원을 받았다. 1996년 생명공학원이 개원되어 35명의 대학원 전임교수와 27명의 겸임교수를 확보하고 독립건물 신축을 추진하고 분자생물학, 식품생명공학 등의 분야를 집중 육성하였다. 이에 따라 1997년 8월 녹지 캠퍼스내에  200억여원의 건설비로 5천여평의 생명공학관을 건립하기 시작하여 1999년 완공하였다. 또한 1999년 생명공학원은 교육부 주관 BK21사업 생명공학 분야 주관대학으로 선정되어 7년간 대학원 학생의 교육 연구를 지원 받았다.  BK21 사업에서는 생명공학원 이외에 정보기술, 의생명, 화학, 지구환경과학의 4개 분야에서 참여대학으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정부지원이 끝난 후 2000년 생명공학원은 생명공학대학원으로 개편하였다. 그리고 2000년 8월 교육부로 부터 이과대학 생물학과와 생명과학부로 학부 통합이 인가되어 2001년부터 생명과학부 신입생을 모집하게 되었고 이후 생명과학대학으로 개편하였다. 2001년 자연자원대학이 생명환경과학대학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식품자원경제학과와 생명환경과학계열로 분리하여 생명환경과학계열 내에 생명유전공학부, 생명산업과학부, 식품과학부, 환경생태공학부의 4개 학부를 두었다.  이후 2006년 생명과학대학과 생명환경과학대학을 통합하여 생명과학대학으로 출범하여 본교 생명과학분야 교육과 연구를 담당하게 되었다. 2004년 약 2300평의 생명환경과학대학 신관을 건축하였고, 농과대학 건물로 건축되었던 기존 건물을 리모델링을 하여 생명과학대학에서 사용하였다.  2002년 소프트웨어 중심의 이과대학 컴퓨터학과와 유무선 통신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공과대학의 전파공학과를 통합하여 정보통신대학을 설립하여 지식기반 사회의 통신과 컴퓨터 기술을 위한 우수 인재의 양성과 연구개발을 담당하는 단과대학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1995년에 전자계산소가 정보전산원으로 개편되면서 부속기관에서 기타 본부기관으로 위상이 조정되었다. 대학에서 정보화는 1990년대를 통하여 주요 화두였기에 정보화 교육은 학생들에게 필수적이었다. 1999학년도부터 정보화 관련과목의 수업이 교양필수로 지정되어 이를 위한 실습실도 아울러 만들어졌다.  교양관, 과학도서관, 서창캠퍼스 도서관에 각각 50대의 최신 기종의 PC를 배치하여 교육에 활용하였다. 정보전산원도 21세기 세계 일류 교육기관으로 거듭나기 위하여 1999년부터 2001년까지 ‘종합정보시스템’ 개발의 중장기 계획안을 확정하여 추진하였다. 이는 정보화기술을 적용하는 교육.연구 시스템, 학사업무의 전산화, 행정.경영업무의 효율화를 목표로 추진하였다. 또한 급속도로 늘어나는 인터넷 통신량의 증가를 위하여 1998년 교육망(KREN.E1) 1회선을 개통하였고, 1999년 데이콤의 보라넷(BORANET.E1) 전용선을 추가로 개통하여 총 6개 회선이 개설되었다.  또한 2000년 3월당시 개교 100주년이 되는 2005년까지 인텔리전트 캠퍼스 21(IC21)을 구현하기 위하여 정보화 추진 사업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를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정보전산원과 정보화추진본부를 통합 조정하여 정보전산처로 개편하여 대학 행정조직으로 편입되었다. 정보전산처는 고려대 정보화의 주도적 추진 및 관련 시스템의 종합관리를 담당하며, 홈페이지 관리는 물론, 지식기반포털 시스템(Korea University Portal to Information Depository, KUPID)를 기획하여 2002년 3월 완성하여 맞춤형 포털 서비스와 그릅웨어 서비스, 커뮤니티 서비스, 웹메일, 인트라넷, 취업정보 서비스 등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2001년에는 무선랜 시범서비스 사업을 위한 장비 설치 공사를 시작하여 도서관 열람실에서 인터넷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고 2004년부터는 고려대 캠퍼스 모든 강의실에서 무선랜을 이용한 인터넷 사용이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총 3단계로 이루어진 10GB네트워크 구축사업이 2003년 8월 완성되어 현재의 backbone 망을 갖추게 되었다.  도서관 역시 인터넷을 활용한 전자저널검색시스템, 원문정보서비스 등이 2002년부터 가능하게 되었다.

1990년대 이후 본교의 교수가 주요 과학기술 관련 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1991년 이과대학 화학과의 진정일 교수가 한국과학상 화학분야 장려상을 수상하였고, 1992년 이과대학 화학과의 김시중교수가 대한민국 과학기술상 화학상을 수상하였다. 1998년에는 이과대학 화학과의 조민행교수가 제1회 젊은과학자상의 화학부분을 수상하였고, 2001년 생명과학대학의 최의주 교수가 생명과학분야 한국과학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국제 석학과의 교류가 점차 더 활발해 졌는데 특히 2005년 개교 100주년 기념으로 다수의 노벨상 수상자를 초청하여 강연회를 가졌다. 과학 분야 수상자로는 1997년 물리학상 Steve Chu 교수, 2001년 물리학상 Carl E. Wieman교수, 1998년 화학상 Walter Kohn교수, 1996년 생리의학상 R. M. Zinkernagel교수, 2001년 화학상 Ryoji Noyori교수, 1986년 화학상 Yuan T. Lee교수, 2000년 화학상 Alan Heeger교수, 2004년 물리학상 David J. Gross교수, 1996년 생리의학상 Peter C. Doherty교수 등 한 해 동안 9명의 수상자의 초청강연을 가졌다.  고려대 자연계 출신의 우수 학자로는 미국 페르미연구소의 김영기 박사, 미국 UC Berkeley대학 화학과의 이승욱 교수 등이 있지만 아직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학자들을 많이 배출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이공대 생활관이 1300여평 규모로 1999년 완공되어 학생식당, 교직원식당, 매점 등 자연계 캠퍼스 복지 문제를 해소하였다. 2002년 본교 캠퍼스의 운동장을 지하광장으로 만든 것은 우리나라 대학 건축사에 길이 남을 만한 새로운 시도였다.  이에 따라 자연계 캠퍼스에도 지하 광장을 건설하기로 하여 하나스퀘어 광장이 2006년에 완성되었고 아울러 건축한 지 25년 이상이 된 과학도서관의 리모델링도 동시에 진행하여 학생 복지시설과 도서관의 불편을 어느 정도 해소하게 되었다. 

2008년 현재 자연계의 단과대학으로 안암캠퍼스에 생명과학대학, 이과대학, 공과대학, 의과대학, 간호대학, 정보통신대학, 보건과학대학, 그리고 세종캠퍼스에 과학기술대학이 있다. 

  


3. 대학 아카데미즘의 미래와 해외 우수대학 사례2)


대학은 고급전문인력을 육성하는 기관에서 사상과 학문을 창조하는 기관으로, 그리고 창조된 학문적 결과로 사회에 기여하는 기관으로 시대의 요청에 따라 역할을 확대해 왔다.  최근 사회에 기여라는 관점에서 대학은 정부 또는 기업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사회에 기여하는 형태의 새로운 대학 아카데미즘이 미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적으로 확산하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세계적 수준의 대학을 육성하기 위한 정부와 대학 자체의 노력은 새로운 대학 아카데미즘을 경쟁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다양한 사회적 요구를 만족하는 의미의 멀티버시티, 교육과 연구도 시장에 의한 자원의 분배와 결정이 일어나는 경제시스템에 근거한다는 아카데믹 캐피탈리즘 등이 새로운 대학 아카데미즘의 형태를 나타내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 속에서 보다 실용적인 학문인 자연과학은 대학에서 그 이전보다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대학들이 현재 세계 최고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들 학교가 성장 발전한 사례를 살펴보겠다.  왜냐하면 최근 한국 대학의 상황은 미국의 1950년대 대학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할 때와 유사한 점이 있다. 2차대전 후 정부지원 연구비의 증가는 대학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게 되었다. 우리나라도 최근 어려운 경제사정에서도 연구개발 투자는 지속적으로 늘리고 있기 때문에 대학은 새로운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미국의 대학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국방관련 연구를 중심으로 운영되던 연구체제는 전쟁이 끝나면서 새로운 연구시스템으로 변화되었다. 전쟁기간동안 국방연구를 수행하던 많은 연구 인력의 이동이 불가피했으며, 이에 각 연구 대학들은 경쟁적으로 우수한 과학자들을 모집하여 연구단위를 구성하고자 했다. 전후 연구대학의 성패는 유능한 과학자 팀을 구성하는 일과 함께 이를 뒷받침 할 수 있는 물질적이고 재정적인 자원을 확보하는 능력에 달려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부지원 연구비의 풍요 속에서 미국의 각 대학들은 이전에는 그리 치열하지 않았던 대학간 ‘경쟁’을 심각하게 경험하기 시작했다. 194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 대학의 재원은 주로 사립재단이나 기부에 의존했고, 대학의 역할은 연구와 지식의 최전선보다는 엘리트 교육에 치중한 바가 컸다. 그러나 국방연구를 통해 정부와의 협력 관계를 경험한 대학들은 정부 연구비가 대학 발전에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고, 따라서 전쟁이 끝나자 더욱 확대된 정부지원 연구비를 확보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달려들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대학이 먼저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연구를 수행할 능력이 있음을 입증해야 하고, 그 기반으로 우수한 연구인력의 확보와 연구인프라 구축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처럼 우수한 연구대학이 되기 위한 경쟁은 다른 한편으로는 각 대학 리더들의 경영능력과 비전을 시험하는 장이었다.


가. 성공의 예 : 미국 UC Berkeley대

UC Berkeley대학은 대학 행정가의 리더십 및 특정분야의 탁월함에서 나오는 후광효과 잘 활용하여 비록 주립대학이지만 세계적인 대학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버클리대학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① 대학 행정가들이 버클리를 우수한 연구대학으로 성장시키려는 공약을 실천한 점, ② 캘리포니아 주정부의 지원이 유래없이 풍족했던 점, ③ 그리고 물리학자 로렌스(E. O. Lawrence)와 그의 방사선 연구소(Rad Lab)의 후광효과를 들 수 있다.  버클리 대학의 성공에는 고든 스프라울(Gordon Sproul)의 대학행정 리더십이 매우 큰 역할을 했다. 스프라울은 서부지역의 동부에 대한 문화적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캘리포니아의 대학들이 우수해야 함을 강조하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이러한 지역성에 대한 호소는 캘리포니아 주정부가 전후 상당한 연구비를 대학에 지원하도록 유인하는 데 효과적이었던 것이다. 스프라울의 리더십 하에 버클리 대학의 각 학과들은 점진적으로 우수성을 획득해 갈 수 있었다. 그의 대학 행정에서 특별한 점은 주정부 지원금 중 대학으로 들어오는 간접비의 일부를 자유재량 기금으로 확보했다는 것이다. 즉 간접비의 일부를 운영자금과는 별도로 지속적으로 적립함으로써 그것이 상당규모로 증가했을 때, 대학 스스로 연구능력을 발전시킬 자율적 재량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기반하에 버클리 대학에는 다양한 연구단들이 만들어지고 그러한 연구단 중 하나로 로렌스의 Rad Lab이 있었던 것이다.

대학행정가의 리더십 그리고 주정부의 전폭적 지원과 더불어, 탁월한 연구자와 우수한 연구단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버클리 대학에 우수한 연구인력이 모일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많은 연구인력들이 핵물리학의 최첨단연구를 수행하는 로렌스의 방사선 연구소에 몰려들었다. 우수한 연구자들의 집중은 결과적으로 로렌스 연구실의 연구업적을 매우 크게 향상시켰다. 플루토늄을 발견한 시보그(Glenn Seaborg)가 운영하는 핵화학 연구, 로버트 쏜튼(Robert Thornton)에 맡겨진 184인치 자기 사이클로트론 개발, 루이스 알바레즈(Luis Alvarez)가 제안한 선형 양성자 가속기 개발, 에드윈 맥밀런(Edwin MacMillan)이 계획한 신형 전자 싱크로트론의 개발 등 Rad Lab은 핵물리학의 최첨단 연구를 수행했으며, 이 연구소의 명성으로 버클리는 가장 우수한 연구대학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 실패의 예: 미국 Yale대학

예일대학은 미국의 우수대학 중에 자연계열이 약한 편이다. 예일대학이 이러한 상태가 된 것은 스타급 연구자를 영입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연구환경을 갖추어야 함을 간과하였다고 분석된다.  예일 대학은 전쟁기간 동안 물리과학 분야에서 국방연구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던 대학이다. 때문에 전후 연방연구지원을 기반으로 한 물리과학 연구능력 향상에 있어서 처음부터 불리함을 안고 있었다. 이 분야에서 뒤쳐질 것을 염려한 예일 대학 총장 찰스 시무어(Charles Seymour)는 뒤쳐진 연구환경을 극복하고 과학분야 학과를 발전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재정적 제약 그리고 총장 자신의 전후 연구환경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예일의 과학분야의 약점을 쉽게 극복할 수 없었다. 특히 교수 승진 자격요건으로 최고수준의 교육을 강조한 것은 과학분야의 연구에 몰두해야 할 교수에게 부적절할 조치였다. 예일대학의 과학분야 교수들은 공간 부족과 강의부담으로 인해 연구에 몰두할 수 없었다.

1940년대 초 예일의 물리학과에서 다른 연구대학과 경쟁하기 위해 스타 연구자를 학과에 영입하고자 했다. 그 후보로 노벨상 수상자인 피터 드바이(Peter Debye)를 영입하고자 제안했다. 그러나 드바이는 그가 임시로 머물고 있던 코넬대학에 남기로 결정했다. 예일대학은 저명한 연구자를 채용하는 것 대신에 물리학 강의를 수행할 전임강사를 충분히 채용하는 것에 그쳤다. 예일대학이 드바이를 채용하는 데 실패한 것은 충분한 연봉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예일대학의 연구환경이 물리학자들에게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다.

전쟁 이후 예일대학 물리학과에서는 원자핵물리학에서 저명한 과학자 그레고리 브레이트(Gregory Breit)를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맨하튼 프로젝트에도 참여했고, 매우 생산적이며 방대한 연구를 수행하던 브레이트의 연구스타일은 기존의 물리학과 교수들과 잦은 마찰을 빚었다. 브레이트는 그가 데려온 7명의 연구조원과 함께 연구할 새로운 연구소를 대학에 요구했다. 학과와의 협상에 성공하여 독립된 연구시설을 갖게 된 브레이트는 정부로부터 5개의 연구과제를 가져왔고, 이로써 예일대학에는 처음으로 정부지원 연구소가가 형성되고 대규모 연구프로젝트가 진행될 수 있었지만 경쟁 타 대학에 비하여 뒤처지게 되었다.


다. 성공의 예 : 미국 UCLA

UCLA의 특징적 발전 패턴은 그것이 캘리포니아 대학체제에 속한 하나의 캠퍼스라는 점에서 비롯되었다. LA 캠퍼스, 버클리의 대학 본부, 대학 이사회의 복잡한 삼각관계가 UCLA의 개혁 방향에 큰 영향을 미쳤다. UCLA가 미국의 주요 연구대학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동력은 대학 차원의 정책적 지원이 아니라 개별 학부와 학과의 발전 노력, 지역경제와의 상호작용,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LA 캠퍼스의 자율성을 강화시켜 나간 것에서 찾을 수 있다.  UCLA의 발전 과정은 특정 분야에서 첨탑을 건설하려했던 스탠포드 대학과 큰 차이를 보인다. 재원이 부족했던 UCLA는 몇몇 최고 수준의 교수를 영입하기 보다는 평범한 강사를 철저히 관리, 감독하여 수준을 향상하게하는 체계를 마련했다. 이러한 전략은 어느 분야도 최고는 아니지만 거의 모든 분야에서 우수한 연구능력을 보유한 UCLA를 가능하게 했다.

1919년 캘리포니아 대학의 남부 분교로 설립된 UCLA는 LA가 대도시로 성장해가면서 그 위상이 점차 높아져 갔다. 하지만 UCLA가 단순한 고등교육기관에서 연구대학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그것이 캘리포니아 대학에 속한 일개 캠퍼스라는 점에서 비롯되었던 제약들을 극복해야 했다. 그리고 UCLA의 특징적 발전 패턴은 바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는데, 구체적으로 LA 캠퍼스, 버클리 대학 본부, 캘리포니아대학 이사회의 복잡한 ‘삼각관계’가 이에 영향을 미쳤다. 먼저 버클리에 소재한 대학 본부는 UCLA의 발전에 별다른 지원을 하지 않았다. 특히 총장 로버트 스프라울(Robert Sproul)은 버클리를 세계 수준의 대학으로 만들기 위해서 UCLA보다는 버클리 대학을 집중 지원하는 정책을 펼쳤고, 버클리 대학의 교수진들도 그들의 배타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UCLA의 성장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물론 딕스트라(Clarence Dykstra)와 같은 LA의 캠퍼스의 총장(provosts)은 나름대로 UCLA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지만, 재정 지원을 결정하는 권한이 스프라울에게 있었기 때문에 가시적인 성과를 낼 수 없었다. 반면, 스파라울의 직접적 영향력이 미치지 못했던 UCLA의 학장들(deans)이 활발히 활동했는데, 이들은 학장회의와 자문위원회를 조직하여 캠퍼스의 정책을 논의하고 결정했으며, 교육과 연구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실질적인 방안들을 마련했다. 캘리포니아 대학 이사회에서 발언력이 있었던 남부 회원들은 이런 학장들의 활동을 지원했고, 버클리 중심의 대학 정책을 비판하면서 UCLA의 발전 필요성을 강조했다. LA 캠퍼스, 버클리 대학 본부, 대학 이사회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있었지만, 결과적으로 UCLA는 1950-60년대를 거쳐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이 시기를 거쳐 1만명이었던 학생수는 2만명으로 늘어났고, 교수는 220명에서 900명으로, 대학원생의 비율은 1/8에서 1/3으로 증가했다. 이러한 수치는 UCLA가 교육기관에서 연구대학으로 변모했음을 보여주는데, 별다른 정책적 지원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 상황에서도 이런 변화를 이끌어냈던 동력은 캠퍼스 내의 개별 학과와 학부의 발전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의학부의 설립은 UCLA의 대학 내 연구 활동이 정착되는데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46년에 비키니 핵실험에 의학 자문자로 참여했던 스태포드 와렌(Stafford Warren)은 UCLA에 의학부를 대학 본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만들어 내었다. 또한 방사선 의학 분야의 권위자였던 와렌은 원자력위원회(AEC)와 연구계약을 맺은 후 연구팀과 연구소를 안정적으로 운영해나갔으며, 국립보건원(NIH)로부터 암 연구 지원을 얻어내어 의학부의 위상을 공고히 했다. 전체 외부 연구지원 예산의 60% 정도가 와렌의 의학부로 집중되었는데, 안정적 재원의 확보가 의학부의 연구활동을 가능하게 한 가장 중요한 동력이었다. 와렌의 의학부는 1950년대 중후반까지 UCLA의 중심 연구센터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유기화학의 권위자이자 화학부의 학장이었던 윌리엄 영(William G. Young)은 UCLA 화학부의 명성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고자 노력했는데, 그 과정은 점진적이고 누적적인 것이었다. 최고 수준의 교수들을 영입하기엔 재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많은 수의 전임강사를 뽑고 그들에 대한 관리를 철저히 하여 최고 수준의 강사만을 교수로 임용했다. 이러한 전략을 통해서 화학부는 UCLA의 최고 학부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이렇듯 UCLA의 연구 체계는 개별 학부, 학과의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 어느 정도 자리 잡았다. 분명 컬리지 중심의 연구 패턴은 학문적 개선을 위한 지속적인 압력을 산출해 낼 수 있었지만, 이미 최고 수준에 올라서 있었던 버클리 대학과 동일하게 평가받지는 못했고, 버클리는 연구 중심이고 UCLA는 직업교육 위주라는 역할 분담의 원리는 여전히 강했다. UCLA가 연구 대학으로 자리 잡기 위해선 그것의 ‘자율성’을 우선 확보해야 했는데, 이러한 변화는 1950년대말에 시작되었다. 버클리와 UCLA 모두 동일한 연구대학을 지향해야한다는 여론과 이사회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면서, 버클리 중심의 대학 운영정책이 변화되었고, LA 캠퍼스의 재정적․행정적 독립을 위한 기반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UCLA의 연구대학으로의 발전 과정은 특정 분야에서 첨탑을 건설하려했던 스탠포드와 큰 차이를 보인다. 윌리엄 영의 화학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UCLA는 최고의 교수 몇 명을 영입하기보다는 평범한 이들을 철저히 관리하고 감독하여 leveling up하는 체계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러한 전략을 통해서 UCLA는 어느 분야도 최고는 아니지만 거의 모든 분야에서 우수한 연구능력을 보유한 대학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라. 실패의 예 : 미국 Pittsburgh대학

1950년대 중반 피츠버그 대학은 총장 에드워드 리치필드(Edward H. Litchfield)를 중심으로 세계 일류의 사립대학으로 거듭나려는 개혁을 단행했지만, 이로부터 비롯된 심각한 재정위기를 극복하지 못하여 실패했다. 대학 운영에 필요한 막대한 재원을 다각화하지 못했고, 체계적인 자체 평가에 기반한 대학 특성화 전략을 추진하지 못했다는 점이 주요한 실패요인으로 분석된다.

2차대전 이후 피츠버그 대학은 다른 미국 대학들처럼 연방정부의 풍부한 지원에 힘입어 크게 발전했지만, 여전히 미국의 중위권 대학에 머무르고 있었다. 1955년 총장이 된 에드워드 리치필드는 피츠버그 대학을 세계 일류의 대학으로 개혁하겠다는 계획에 착수했다. 당시 피츠버그 대학의 교수진 중에서 박사학위 소지자는 56%에 불과했고, 대학의 주된 임무 또한 연구보다는 교육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우선 리치필드는 교수진의 연구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교수의 연봉을 올리고 강의 부담을 줄였으며 안식년 휴가제를 도입했다. 이와 함께 리치필드는 기존 학과들에 대한 평가를 진행하면서, 경쟁력 없는 학과를 점차 없애 나가고 새로운 유망한 학과들을 설립해 나갔다. 또한 그는 학생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입학 기준 점수를 대폭 올렸으며, 대학원 중심의 대학 정책을 펼쳐 1/4이던 대학원생의 비율을 2/5까지 끌어올렸다.

이와 같은 개혁이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원이 지속적으로 지원될 수 있어야 했다. 개혁 초기에 리치필드는 이러한 자금을 자선단체로부터 지원을 받고 학생 수업료를 인상하여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본적인 재원의 기반이 허약했던 피츠버그 대학은 1958년부터 적자를 내기 시작했고, 그 폭이 점차 늘어나 1960년대 초반에 심각한 재정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에 총장 리치필드는 대부금을 얻어내 대학개혁 초기 투자비용을 일단 충당하고 1962년부터 흑자 운영을 한다는 계획을 세워 이를 시행했다. 하지만 이후 피츠버그 대학의 재정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대학 이사회로부터 압박을 받았던 총장 리치필드는 1965년에 결국 사임하게 되었다. 피츠버그 대학을 일류 사립대학으로 변모시키겠다는 리치필드의 계획은 무산되었는데, 주 정부의 도움을 받아 재정문제를 간신히 해결할 수 있었던 피츠버그 대학은 이후 주립대학으로 재건되었다.

피츠버그 대학의 개혁 실패는 총장 리치필드의 리더십 부족과 같은 다양한 요인이 중첩된 결과이지만, 크게 세 가지 결점으로 이를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첫 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은 피츠버그 대학의 협소한 재정지원 기반이다. 리치필드는 몇몇 부호의 개인적 부호를 받아내는데 능했으며, 카네기 기술원(Carnegie Institute of Technology)으로부터 막대한 지원금을 얻어낼 수 있었다. 사실 피츠버그 대학이 얻어낸 재정 지원은 결코 적지 않았고, 이를 통해 초기의 대학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불안정한 지원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재원을 다각화하려는 노력을 등한시함에 따라 이후의 심각한 재정 위기가 초래되었던 것이다. 두 번째로 피츠버그 대학의 지방주의적 편협함 또한 대학 개혁을 실패로 이르게 한 요인이었다. 리치필드는 다른 일류 대학과 연구소들의 최신 연구경향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에, 정부로부터 연구지원비를 원활히 얻어내지 못했다. 또한 그는 학내 연구 지원 우선순위를 제대로 선정하는데도 무능력했다. 마지막으로 개혁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과 체계적인 자체 평가가 부재했다는 점도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개혁 과정에서 피츠버그 대학이 가지는 장점과 단점을 면밀하게 분석하는 작업이 없었으며, 따라서 그것에 대한 체계적인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했던 것이다


마. 성공의 예 : 미국 아리조나 주립대(University of Arizona)

아리조나 대학은 지역경제에 봉사하던 기술중심 대학의 위상을 벗어나기 위하여 지역적 이점을 살릴 수 있는 연구 분야(천문학 및 인류학)를 집중적으로 육성하였다. 또한 다른 대학과의 경쟁을 피할 수 있는 새로운 분야를 발굴하고 기초학문과의 연계성을 강조함으로써 연구대학의 위상을 얻을 수 있었다.

1950년대 지역에 봉사하는 대학으로서의 위상을 강조하였던(예를 들면 농과대학) 아리조나 대학은 스푸트니크 시대 이후 연구를 중시하였지만 낮은 등급에 랭크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1970년대를 경유하면서 대학은 지역적인 명성을 가진 연구대학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80년대 후반에서는 상위 20위권의 연구대학으로 성장하였다. 이와 같은 발전에는 학문적 발전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실용주의가 큰 영향을 미쳤고, 다른 연구대학들처럼 우수연구센터 건립, 유명학자 유치, 자원의 활용도 증가도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특히 아리조나 대학이 연구대학으로 성장하는 과정에는 자연적 또는 지리적 이점을 충분히 활용한 것이 중요했다. 대기물리학 연구소(Institute for Atmospheric Physics)의 설립은 대학의 연구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지역적 특성과 장점을 이용한 연구소의 설립은 리차드 카산더(Richard Kassander)와 같은 유능한 학자 아래에서 연구중심의 전통을 강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대기연구에 관심을 가진 미국과학재단(NSF)의 지원은, 대학과 연방 과학기구와의 연결을 낳는 중요한 고리가 되었다. 대기물리학 연구소는 대학의 다른 주요 연구소들(Organized Research Units: ORUs)의 재정지원에도 도움이 되었다. ORUs는 1958년 록펠러 재단의 지원을 받고 지역의 특성을 살린 ‘불모지 연구소’에서 시작하여 수자원연구소, 태양에너지 연구실험실 등 각종 연구소들의 총체이다. 특히 ‘불모지 연구소’는 기존 농과대학의 상업적 경향 연구소와는 다른 연구소로서, 대학의 지구과학부가 상업적 연구(광산개발 등)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연구내용으로는 천문학과 인류학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천문학을 중심으로 한 연구의 수렴은 해당학부의 발전에 기여하였고, 달․천체연구소가 대기물리학 연구소의 부설기관으로 설립되면서 당시 NASA와 연계되어 활발한 연구를 수행하였다. 또한 1964년에 설립된 광학연구센터는 고성능망원경을 만들려고 했던 군 당국의 이해와 결부되면서 기초/응용연구의 접합을 가능하게 하였다. 한편 토착인들이 살던 아리조나 지역의 특성을 살린 인류학 연구는 다른 과학분야와는 달리 지역으로부터 광범위한 재정적 지원을 얻을 수 있는 연구주제였다.

1971년 36세에 총장으로 취임한 존 세퍼(John P. Schaefer)는 천문학과 인류학을 중심으로 한 ‘첨탑건설’ 전략을 사용하였다. 재정운영에 자율권을 가졌던 총장은 주요 주제에 전략적 지원을 하였고 끊임없이 신진학자들을 영입하고 외부기관에 의한 평가를 제도화하였다. 또한 대학 연구의 산업적 가치를 지역 외부인사들에게 효율적으로 설득하여 재정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한편 세퍼 총장은 중점적으로 지원하는 분야의 더 나은 발전을 위하여 기초학문(화학, 생물학, 수학, 물리학 등)에 대한 지원도 병행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80년대 아리조나 대학은 천문학과 인류학뿐만 아니라 폭넓은 분야의 연구전통을 지니게 되었다.  


미국 대학의 예를 종합적으로 정리하면 아래의 표와 같다. 이것으로부터 대학 발전을 위하여 고려해야할 사항은 우선 대학 행정가 및 핵심 연구자의 강력한 권한 및 자율성의 부여이다. 그리고 학과(학부 및 대학원)와는 독립적인 유력 연구소의 존재하는 것이 중요하고, 정부 또는 지역 경제 및 산업계와 대학 사이의 안정적인 관계 확립를 유지하여 연구분야의 특화가 필요하며, 외부기관에 의한 상시적 대학평가 체제를 마련하여야 하며, 재정의 자율적 다각화가 중요하다.


미국 연구중심대학의 성공요인과 실패요인 분석

성공요인

실패요인

․ 대학 내 조직화된 연구단위의 형성과 발전, 이를 통한 우수연구 인력 확충

․ 첨탑 건설(Steeple Building) 전략 및 관련 연구분야 사이의 안정적 네트워크 형성

․ 개별 학부의 발전을 통해 우수 연구인력을 상시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체제 마련

․ 대학행정가 및 핵심 연구자의 탁월한 리더십

․ 지역경제(기업)와 대학 사이의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관계 확립

․ 대학의 지리적 특성을 살린 연구분야 특화

․ 스타 연구자를 제외한 연구환경 구축 실패

 

․ 행정가 및 핵심연구자의 장기적 전망 부재

 

․ 대학 재정 다원화 실패

 

․ 체계적 평가에 기반한 대학 특성화 전략을 추진하지 못함


4. 본교 자연과학분야의 미래지향적 과제


비록 대학설립이래 실용적인 이공계 설립에 대한 관심은 지속되었지만 고려대학교의 이공계는 국내 유수대학들에 비하여 출발이 늦었다. 그리고 인문사회 중심의 전통은 이공계의 학부가 지속적으로 늘었지만 역시 경쟁의 국내 타 대학에 비하여 시설, 교원수, 학생수 등의 양적인 면에서 여전히 열세이다. 현재 교수수에서도 의과대학을 제외하면 인문사회계열보다 자연계열의 교원수가 적고, 학생수는 인문사회계열 : 자연계열 = 55:45의 비율이다.  따라서 자연계열은 국내외 유수 타 대학과의 경쟁에서 양적인 열세를 극복해야 하며 동시에 질적인 수준도 획기적으로 향상시켜야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일찍이 미국 UC Berkeley 총장인 클라크 커는 “명성이란 일단 갖추기만 한다면 기관이 갖고 있는 최대의 자산이 된다”고 한 바와 같이 명성은 만들기는 어렵지만 일단 만들어지면 타 대학이 따라 오기 힘들다. 명성은 유리한 재정지원을 얻을 수 있게 하고, 우수한 교수와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모일 수 있도록 한다. 이는 더욱 명성을 쌓을 수 있게 하는 긍적적 피드백을 만들어 대학간의 더욱 격차를 벌인다.  그러나 고려대학교의 이공계는 아직 이러한 명성을 국내외에서 갖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이미 명성을 가진 대학을 상대로 명성을 더욱 높이 쌓기 위하여 획기적인 전략이 필요하다. 그러면 이러한 명성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명성을 가진 대학은 다양한 좋은 점들을 갖추고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수한 교원의 확보이다.  특히 이공계에서는 평균적으로 우수한 교원의 확보도 중요하지만 특출한 소수의 우수학자가 더욱 중요하다.  따라서 이공계의 발전을 위하여 이러한 특출한 소수를 영입하거나 또는 신진교수 중에 특출한 우수교수를 육성하기 위한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대학이 가진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그리고 우수한 교원과 함께 좋은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사회에 진출하여 국가에 기여하는 것이 곧 고대 자연과학의 명성을 쌓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고려대의 전통과 고대정신은 고대인 안에 항상 내재되어 응집력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5. 고대정신과 자연과학

고대정신은 개교 이래 간단히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초기에 본교는 교육구국의 정신을 개교하였다. 따라서 식민지 상태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고 나라를 구하기 위한 투사적 저항적 기질은 본교 학생의 시대정신으로부터 형성된 고대인의 기질이 되었다. 이후 김성수 선생께서 본교를 맡기 시작한 후 공선사후와 신의일관의 정신은 개인보다는 집단을 위한 기여가 중요함을 강조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고려대는 집단내의 결속이 매우 강한 집단이 되었다. 해방 후 자유를 갖기 시작한 대학은 19세기 독일의 연구중심대학의 이상인 자유를 누리면서 본교도 자유, 정의, 진리의 상아탑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하여 노력하게 되었다.  그러나 암울한 상황을 벗어나 국가 자립경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비민주적인 요소들이 사회에 만연하게 되었고, 이에 본교생은 강한 집단 결속과 투사적이면서 저항적인 기질이 표면화되어 본교생의 특징이 지성과 야성으로 요약될 수 있었다. 90년대 이후 국제화는 세계적인 추세가 되었고 우리학교에서도 막걸리보다 와인을 마시고 영어로 강의를 하는 세계인을 육성하기 위한 시도를 하게 되었다. 2008년 이기수총장이 취임한 이후 그 동안 우리 고대인의 강점을 되살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법고창신과 개척자 정신은 고려대 현재의 시대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고대 전통은 민족.민주적 전통, 비판.저항적 전통, 화합.신의적 전통, 서민.대중적 전통으로 요약되었다.3)

대학에서의 자연과학분야 육성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과학기술자 육성과 경제.사회 발전, 국방연구 기여 등 실용적인 목적이 있다.  선진국은 국가를 자체적으로 보위할 수 있는 국방력을 갖추고, 총성없는 전쟁이라고 하는 경제 발전의 경쟁에서 앞서 나가는 나라이다.  최근 우리나라 국민들의 열망은 우리나라가 G7과 같은 선진국 대열에 올라서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국방력강화와 경제발전은 필수적이다. 역사 속에서 강한 나라, 발전하는 나라는 항상 강한 무신들을 가지고 있었다.  최근 선진국은 우수한 과학기술인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즉 현대판 무신이 과학기술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전쟁은 직접 총을 들고 나가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우수한 전자 장비를 갖춘 첨단 무기로 장착하여 직접 사람이 전쟁터에 있지 않아도 이길 수 있는 전쟁을 한다.  경제 전쟁에서도 사람들이 물건을 팔러 다닐 필요가 없이 가장 우수한 기술로 만들어진 상품은 전 세계의 상인들이 물건을 사기 위하여 몰려들 것이다.  이렇듯 현대판 무신인 과학기술인은 또한 정신적인 무장을 하고 있어야 하며, 바로 그 요소로서 고려대의 100년 역사에서 흐르고 있는 전통인 비판.저항적 전통과 화합.신의적 전통이 될 수 있다. 비판.저항적 전통은 과학기술 발전에 원동력이 되기 때문에 더욱 고취하여야 한다. 반면 화합.신의적 전통은 집단 결속의 장점이 있지만 간혹 소속되지 않은 타인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의 약점이 있다. 과학기술계는 융합과 소통이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학자간 또는 학문간 개방적인 태도가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화합과 신의적인 전통은 고려대 내에서 만의 배타적인 태도가 아니라 좀 더 넓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화합하여 국내외 학자들간의 네트워크 형성을 위한 외향적 태도로 발전해야 한다.


결론 : 고대정신 속에서 자연과학 방향


고대정신속에는 저항적 정신과 비판적 정신이 있다.  이러한 저항과 비판은 창조의 원동력이다.  특히 창조력을 필요로 하는 이공계에서는 기존패러다임에 대한 비판적 사고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일찍이 토마스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과학 혁명은 지속적 지식축적을 통한 점진적인 발전 보다 기존 패러다임에 의하여 설명이 불가능한 변칙(anomaly)사례의 축적으로부터 새로운 패러다임이 만들어지는 획기적 변화에 의하여 일어난다고 주장하였다.  바로 이러한 획기적 변화를 만들어 내는데 저항과 비판 정신은 매우 중요하다. 20세기 초 양자역학과 상대성 이론으로 대변되는 물리학 혁명이후 형성된 과학계의 패러다임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패러다임은 생명과학에도 분자를 사용하는 기계론적 입장에서 접근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매우 복잡한 현상인 생명현상을 기존의 패러다임 속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는 별로 성공하지 못하고 있고 21세기의 과학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이공계는 이러한 과제에 고대정신을 통하여 기여할 수 있을 것이고 학교의 명성도 쌓을 수 있는 획기적인 기회를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 필요한 것은 과거에 대한 철저한 연구를 통하여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받아들이는 개방적인 태도이다. 이는 화합적이고 신의적인 고대 전통의 더욱 발전된 형태라고 할 수 있고, 또한 이것은 법고창신의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훌륭한 과학기술자는 과학과 기술의 새로운 발견 또는 발명의 과정에서 항상 과거의 업적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도를 하는 프론티어의 정신을 발휘한다.  고려대학교는 이러한 생각을 가지는 특출한 교원이 필요하고, 이러한 생각을 가지는 학생을 육성해야 한다.  대학의 발전에서도 새로운 시도에 대한 과감한 도전을 항상 필요로 해왔다. 400년 역사의 미국 하바드대학에서 가장 위대한 총장으로 꼽히는 두 사람으로 C.W. 엘리어트(재임 1869-1909)과 J.B.코난트(재임 1933-53)가 있다.  이 두 총장은 공교롭게도 화학자이다. 엘리어트 총장은 40년이라는 총장재직 기간 동안 하바드 대학에 최초로 학부 선택과목을 도입하였고, 산업을 발전시키는데 필요한 실용적 인력을 양성하는 기관으로 변모시키면서 당시 미국 대학개혁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코난트 총장은 하바드가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의 대학에서 벗어나 가장 우수한 다양한 학생을 선발하도록 하여 세계 최고의 대학이 되는 기반을 만들었다.  이렇게 자연과학의 개척정신은 대학의 변화를 일으키는 계기를 만들 수 있다. 특히 사회가 요구하는 대학의 변화에 대한 자연과학적 기여와 전통적인 고대정신, 그리고 미래지향적 고대정신의 조화는 고려대학교의 새로운 출발의 기반이 될 것이다.


        



1) 이 부분은 <고려대학교 100년사 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고려대학교 100년사 I, II, III"에서 자연계 역사와 관련된 부분을 발췌 정리한 것임.


2) 2005년도 학술진흥재단 정책연구 ‘전승준 외 : 연구중심대학 육성을 위한 기획연구’에서 발췌 정리함.


3) 앞서 ‘인권한 : 고대정신과 전통론’에서 언급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