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라는 직업

전승준 (고려대 화학과)


오랜만에 정연보의 연락을 받았다. 매우 반가웠는데 69회 회보에 글을 써달라는 것이었다. 가끔 과학기술에 대하여 칼럼을 쓰기도 하였지만, 이러한 글을 더군다나 주제도 알아서 쓰라는 것은 조금 난감하였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삶에 별로 특별한 굴곡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글로 쓸만한 거리가 없어 고민하다가 내 직업인 교수에 대하여 쓰기로 했다. 왜냐하면 그냥 평범한 삶을 살아왔던 것 같으면서 어쩌면 평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너무 학교에 오래 다니고 있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6년, 중고등학교 6년, 대학교 4년, 석박사학위 5년반, 대학에서의 연구원생활 2년, 대학교수 21년, 전부 합하면 거의 45년 이상을 학교에 보냈다. 정말로 대학 졸업하고 사병으로 2년 3개월동안 복무한 기간을 제외하면 초등학교 입학한 후 항상 학교에 만 있었다. 나는 대학입학 때 재수를 하였지만 대학을 다니면서 했기에 군복무 기간을 제외하면 항상 학교에 있었다.  아마 우리 동기들 중에 나와 같은 대학교수가 꽤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상당수의 교수들이 나와 비슷할 것 같다.

우리 동기들 중에 공부를 잘하고 정말로 공부를 좋아하는 특별한 부류가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절대로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고등학교 다닐 때는 교수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대학에 다니면서 다들 하니까 하고 그러다 보니까 결국 학교에 있는 직업을 갖게 되었다. 나의 대학교수 생활을 되돌아보면 꽤나 한심한 것 같다.  항상 어린 학생들을 데리고 폼잡는 골목대장 비슷하였다는 생각을 한다. 대학교수는 학생을 가르치는 교육자이면서 새로운 지식을 위하여 연구하는 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 하면 강의를 잘하는지에 대하여 배우거나 별로 연구해보지 않고 강의를 했으며, 학생들도 별로 재미없어 하는 강의를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교육자로서 갖추어야 한다는 고매한 인격과도 별로 관계가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좋은 연구 결과를 내놓는 학자라도 되어야 할 텐데 연구논문은 어느 정도 발표하였지만 정말 창의적인 연구 결과로 내세울 만한 것이 있는가하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그나마 내게 다행인 것은 현재 근무하는 고려대학교는 정말 교수를 잘 대우해 주는 학교라는 것이다. 아직 학생들이 교수에 대하여 어느 정도 존경심을 갖고 있는 것 같고, 직원들도 교수에 대해서는 항상 복종적으로 학교에서 상당한 대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심한 교수생활을 하다 보니 그래도 무엇인가 기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그 덕분에 잠시 외도를 하게 되었다. 내가 학자로서 삼류인 것은 내가 능력이 모자란 면도 있었지만 우리나라의 연구여건의 문제도 있었다고 생각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정부의 과학기술 정책 입안에 관여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나는 삼류이지만 우리나라도 일이십년 후에는 일류 학자를 배출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일종의 폴리페서가 되었다. 이명박 대통령의 후보시절 과학기술 분야의 공약을 만드는데 관여를 하였고, 그 인연으로 이명박 정부 출범당시 두 달 정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경제2분과의 과학기술정책을 총괄하는 전문위원을 하면서 공무원들과 일할 기회를 가졌고, 그 후에도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운영위원과 현재 한국연구재단에 파견 근무를 하면서 아직 외도를 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 동기들 중에서도 공무원이 교수만큼이나 많을 것 같은데 잠시 공무원과 일을 하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 정말 우리나라가 이만큼 잘 살게 되는 데는 틀림없이 공무원의 열의와 충성심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보통 슬로우 템포의 학교 생활에 젖었던 나로서는 매일 오전 7시부터 저녁 9시 이후까지 주말도 없이 근무를 하고 업무의 방향이 정해지면 어떻게 그 일을 그렇게 빨리 해낼 수 있을까 놀라울 정도였다.  나 역시 농땡이로 안 찍힐 정도로 열심히 노력하였지만 인수위 내 소속분과에서 아마도 내가 일을 가장 적게 하였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공무원의 문제점도 발견하였는데 자그마한 권한에 억매여 있고 위험을 회피하는 관료주의 체제의 문제였다. 리스크 테이킹을 할 수 없는 환경에서 공무원이 하기 힘든 큰 스케일의 변화에 대하여 차라리 나처럼 관료주의에서 벗어나 있는 교수가 할 수 있는 일도 있었던 것 같다.  정부 과학기술예산을 10조 수준에서 이명박 정부 마지막 해인 2012년에는 16조2천억원수준으로 증가시키는 것, 그리고 대학에 지원하는 개인소규모 연구를 4천억원 수준에서 1조5천억원 수준으로 대폭 증가시키는 계획을 성사시키는데 나름대로의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예산의 증가는 단지 문제해결을 위한 필요조건에 불과하기 때문에 연구지원제도와 환경을 개선하는데 현재에도 참여하고 있는 셈이다.

최근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의 영웅으로 꼽히는 하급 사무라이인 사카모토 료마가 인기 TV사극을 계기로 재조명된다고 한다. 언젠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의 성공요인으로 하급 사무라이들의 역할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일본의 사무라이는 우리나라의 선비와 유사한 그릅인 것 같다. 무사로서 녹봉이 주어지기 때문에 평화로운 막부시대에는 할 일 없이 놀고 먹는 지식층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서구문명을 일찍 받아들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놀고 먹는 것 같지만 지식층으로서 항상 문제점을 찾고 배우는 하급 사무라이의 개혁적인 생각이 유신 성공의 저변에 깔려 있는 힘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나라의 대학교수도 일부를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그릅으로 만들면 국가에 기여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언젠가 우리 동기인 정신과의사 홍택유가 유명 오케스트라 지휘자는 아주 오래 살고 그만큼 좋은 직업이 없을 것 같다는 것이다. 가장 좋아하는 음악을 하면서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는 황제처럼 군림하면서 하고 싶은 것을 다하고 대우와 존경도 받는다는 것이다. 맞는 말인 것 같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즉 취미생활을 하면서 그것으로 먹고살 수 있는 직업이면 참 좋은 직업일 것 같다. 교수도 마음만 그렇게 먹으면 그런 직업에 가까운 것 같다.  나는 교수로서 한심하게 지냈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우리 딸애가 유학가서 학위과정에 있으면서 교수가 되기를 원하는 것 같으니 아빠가 그렇게 한심하게 보이지만은 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