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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융합, 신학문의 탄생


융합의 필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후반 무렵부터로, 90년대 초에 등장한 나노 연구와도 깊은 관계가 있다. 당시 나노 과학과 나노 기술이 새로운 연구 분야로 떠올랐고 산업기술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모았다. 그 후부터 학문적, 기술적 융합이 본격화된 것으로 보인다.  


나노 연구는 90년대 이전에는 학문적으로나 기술적으로 매우 어려운 분야였다. 나노라는 분야의 이름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80년대 중반 노벨상을 받은 전자주사현미경의 발명과 탄소 풀러렌 분자의 합성, 탄소나노튜브 등 나노 분야의 주요 과학적 업적이 잇달아 발표되면서 이를 연구하고 산업에 응용하기 위해 여러 분야의 연구자와 기술자들이 관심을 갖고 참여했다. 물리학, 화학, 재료과학, 전자공학 등 여러 분야의 상당수 과학기술자들이 서로 협력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최근에는 나노 뿐만 아니라 생명과학, 의학, 그린 에너지 분야 등 다양한 학문 분야의 융합연구를 강조하고 있고, 융합적 마인드를 가진 인재 육성을 위한 교육의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이처럼 융합이 강조되는 것은 과학을 비롯한 근대 서양 학문의 관점에서 보면 특이한 현상이다. 왜냐하면 서양 학문, 특히 16세기 근대 과학혁명 이후 과학은 특정 분야를 고립시켜 분석적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어 학문의 세분화가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분화된 학문들이 계속 만들어졌고, 어떤 면에서는 지금도 특정분야 전문가들이 계속 육성되고 있다.


실용성을 중시하는 미국에서, 융합분야 성과 두드러져


자연을 연구하는 학문인 자연과학도 철학에서 분리된 이후 수 백 년 동안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지구과학 등으로 세분화되었고 아직도 분화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융합에 의해 새로운 분야가 태어나 학계나 산업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경우가 적지 않다. 대표적인 예가 20세기 전반부에 미국의 대학과 학자들을 중심으로 태어난 화학물리(Chemical Physics) 분야와 분자생물학(Molecular Biology) 분야이다.  

화학물리는 미국의 물리학자와 화학자들 중심으로 탄생된 새로운 학문이다. 20세기 초까지 물리학과 화학의 중심지는 유럽이었다. 당시 유럽 보다 실용성을 강조하는 분위기였던 미국에서는 물리학의 이론을 화학자들의 관심인 실제 자연계에 존재하거나 또는 새로이 합성된 복잡한 화합물의 성질을 설명하는 데 응용하였다. 물리학의 엄밀한 이론을 근사적 방법으로 화학계의 여러 문제를 학문적으로 또는 실용적으로 해결하는 데 훌륭하게 적용한 것이다. 그 결과 많은 화학물리학자들이 노벨상수상과 같은 학문적 업적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산업에도 적용해 큰 성과를 거두었다. 

분자생물학도 미국의 물리학자, 화학자, 그리고 생물학자들을 중심으로 탄생한 학문이다. 20세기 초반 물리학자들이 엑스선의 발견과 더불어 이 새로운 광선을 이용하여 원자나 분자들이 단순하게 규칙적으로 배열한 광물 결정의 원자․분자 배열구조를 알아내는 엑스선 회절 방법, 그리고 원자와 분자의 구조를 설명하는 양자역학을 고안했다. 복잡한 생체분자들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화학자와 생물학자들에게 물리학의 새로운 방법을 응용하려는 시도는 새로운 것이었다. 그 결과 분자생물학이 탄생했는데, 기초학문을 지원했던 록펠러 재단은 이 분야를 학문으로 정착시키는데 기여했다.


상호관련성 중시하는 동양인, 융합연구에 적합


융합을 강조하는 것은 최근에 형성된 분위기이고, 이것이 과연 먼 미래까지 이어질 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융합연구로부터 새로운 학문 및 산업의 발전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효과적으로 융합연구의 여건을 조성하고 융합에 적합한 인재를 육성할 필요가 있다.

융합은 부분의 분석보다는 부분들의 상호관련성에 관심을 두는 종합주의(holism)적 사고가 중요하다. 미국 미시간대학 심리학 교수인 리차드 니스벳이 쓴, 동양인과 서양인의 인지 특성 연구를 다룬 명저 ‘생각의 지도’를 보면 동양인은 사물들의 상호 관련성을 훨씬 더 잘 파악한다고 한다. 어쩌면 융합연구는 동양인의 이러한 특징에 적합한 과학분야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세계적인 명성의 대학은 새로운 학문 분야 또는 학문 조류를 만들어 낸 곳이었다. 융합 학문의 활성화는 새로운 학문 분야를 만들어 위대한 학문적 명성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그런 면에서 고려대는 융합 학문을 활성화하기 위한 인재 육성, 제도 확립, 연구 및 교육 환경 조성 등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융합은 전문성이 없는 다양한 분야의 박식함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 가지 이상의 전문성을 가지면서 두루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진 ‘T’자나 나아가 ‘Π(파이)’자 형 인재가 필요하다. 전문가이면서도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관심을 갖는 인재를 고려대에서 양성한다면 최근 강조되고 있는 융합의 조류가 고려대의 명성을 향상시키는데 기여할 것이다.       


전승준(고려대 화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