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칼럼]학문융합, 신학문 탄생의 기회
전승준 고려대 교수 화학
1990년대 이후 학문의 융합이 새로운 경향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에서도 이공계통에서 융합기술(Fusion Technology)이라는 이름으로 정보기술과 생명기술의 융합, 나노기술과 정보기술의 융합 등이 연구개발의 새로운 추세로 자리잡았고 융합기술이 신산업을 창출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학문분야에서도 융합학문의 육성을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이공계의 전통적인 학문분야 사이의 융합뿐 아니라 인문사회분야와 과학분야 사이의 융합을 위한 학문적 교류를 장려하는 분위기다. 그런데 서로 상이한 학문들 간 융합은 최근에 처음 시도된 것이 아니다.
르네상스 이후 근대에 들어오면서 서양의 여러 학문분야는 그리스 시대의 철학에서 세분화돼 갈라져 나왔다. 과학도 철학으로부터 분리되었고, 더 세분화되어 우리가 지금 배우는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학문 분야가 영역을 확립하여 자리잡은 지는 이삼백년에 불과하다. 학문 세분화는 20세기에도 지속돼 현재 수많은 학문 분야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세분화와 반대로 간혹 학문의 융합이 이루어지면서 새 분야가 탄생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자연과학분야의 화학물리(Chemical Physics)나 분자생물학(Molecular Biology)이다. 화학물리 분야는 20세기 전반 미국 대학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융합 학문이다.
유럽에 비하여 실용적인 분위기였던 미국은 물리학의 단순한 모델에 근거한 이론으로 복잡한 화학현상을 설명하고 응용하는 연구를 하는 과정에서 물리학과 화학을 연결하는 학문을 탄생시켰다. 특히 이 분야는 미국물리원(American Institute of Physics)에서 발행하는 학술잡지 화학물리지(Journal of Chemical Physics)가 1933년 창간되며 획기적으로 발전하였다.
분자생물학 역시 20세기 전반 미국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20세기 초 유럽의 젊은 물리학자를 중심으로 탄생한 양자역학이나 엑스선 회절 구조분석 방법은 야심찬 학자들을 흥분시켰고, 이들 방법으로 분자를 연구하는 화학자와 생물학적 현상을 분자 수준에서 연구하고 싶어하는 생물학자들 사이의 교류는 분자생물학이라는 융합 학문을 탄생시켰다. 이 분야가 학문으로 정착하는데 미국 록펠러 재단의 연구지원이 큰 역할을 하였다.
1938년 처음으로 분자생물학이라는 말을 사용한 워런 위버가 재단의 기초과학 연구지원 책임자로 이 새로운 융합 학문 분야에 적극적인 지원을 하였다. 위대한 결실이 왓슨-크릭에 의한 DNA 이중나선 구조 결정이고 이를 계기로 생명과학은 획기적인 발전을 하였다.
융합의 방법은 서양 과학의 분석적이고 세분화하는 전통적인 방법과는 상이한 경향으로 21세기의 새로운 학문 발전 추세이다. 이러한 경향은 자연현상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려는 동양적 방식에 더 적합해 동양에서 새로운 학문 분야가 탄생할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있다. 학문융합을 위하여 학자들이 학문적으로 마음을 열고 잡지 발간, 재단 지원, 상이한 학문분야 학자들의 모임 기회 제공 등이 뒷받침된다면 우리도 신학문을 탄생시킬 수 있을 것이다.
경향신문 2009/07/30